게시자 : 갠달프  게시일 : 2001년 10월 2일  

1장. 영혼을 나눈 친구 (1)

이타냐와 미두란의 전쟁터 한가운데에 브레일이라는, 한 고립된 마을이 있었다. 황량한 주변에서는 항상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져 떠돌아다니기 좋아하는 방랑자들도 쉽게 방문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브레일은 전쟁터 한가운데라기엔 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마치 보통의 평화로운 마을처럼, 긴장감보다는 활기가 넘치고 마을 자체도 큰 편이다.
그 브레일의 거리에 외부에서 온 듯한 꼬질꼬질한 부랑자가 무언가 가득 담긴 낡은 푸대자루를 어깨에 매고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서 풍기는 냄새가 여간 고약한 것이 아니었다. 스쳐 지나간 사람들은 손으로 코를 막고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 부랑자의 이름은 '나다'였다. 그는 몹시 지쳐있었다. 눈의 초점이 흐려진 채로 타박타박 걷는다. 그러다가 문득 멈춰서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지나가던 누군가를 붙잡고 물었다.

"여관 어딨수?"

지나가던 행인은 부랑자의 고약한 냄새와 꼬질꼬질한 차림, 별로 품위롭지 못한 말투를 듣고 얼굴을 찌푸린 채 그냥 지나갔다. 사람들이 외면하자 나다는 영 피곤한 듯 푸욱 한숨을 쉬었다.
그때 나다의 앞에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키가 작아서 어린아이를 쳐다볼 때 외에는 대개 고개를 들어 쳐다봐야만 하는 나다는 무거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키는 멀쑥하지만 얼굴은 무척 앳돼보이는, 전형적인 사제들의 머리모양인 단발머리를 한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이다. 진갈색의 로브에 앞뒤로 크림색의 투박한 천을 늘어뜨린 정식사제의 복장이었다. 기이한 일이다. 견습사제는 많지만 정식사제가 되기는 무척 힘들었다. 적어도 스무살이 되지 않으면 정식사제가 되기 위한 시험을 치기도 힘들었고, 대개 거의 다 탈락하는지라 십년넘게 재시험보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게다가 사제는 대개가 다 귀족이다.

"저....."

볼을 발갛게 붉히며 우물쭈물하는 소년사제를 보자 나다는 짜증이 났다. 조금 더 뜯어보니 옷의 재질이 비단이 아닌 것을 보아 평민출신의 사제다. 좀 의심스러운 면이 많아서 나다는 경계했지만 일단 나이 어리고 귀족이 아니란 점에 마음을 놓았다.
우물쭈물 말을 못하는 사제 대신 나다가 말을 툭 뱉았다.

"여관 어딘지 아슈?"

사제는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도 방금 도착한 걸요. 근데, 저..."

나다는 잠시 또 의아해했다.

'어, 나한테 존댓말하네.'

아무리 평민출신이어도, 아니 평민출신이기에 정식사제는 감히 나다가 쳐다보지도 못할만큼 높은 지위였다.
아무튼 출세한 녀석이니까. 너무 어려보이는게 사기성이 농후해 보이지만...
부랑자에게 존대하는 정식사제라.
하지만 나다는 더 이상 머리를 굴리고 싶지 않았다. 너무 피곤하다. 그는 소년사제를 밀쳤다.

"할말 없으면 비키쇼."

그러자 사제는 급히 그의 어깨를 잡았다.

"저 모르시겠어요?"

나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리 많이 봐줘도 소년티를 겨우 벗을까 말까한 청년? 사제는 나다가 자신을 곰곰히 뜯어보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여잔가?'

오, 그럴 리가. 곱상하긴 해도 여자는 아니야. 그리고 가만히 보니까 생각보단 나이가 좀 있는거 같은데. 얼굴이 동안이라 그렇지 골격을 보니 열다섯은 넘었겠어. 피부는 하얗고 깨끗한게 고생 모르고 자랐나보군. 하얀 피부에 시커먼 머리카락이 그렁저렁 잘 어울리는데, 미남은 아니지만 봐줄만 해. 계속 미소짓고 있는줄 알았는데 얼굴 자체가 미소짓는 상이군. 하긴 이십사시간 빙긋거리고 있으면 얼굴에 경련날거야. 어색한 미소를 자주 짓는군. 경계할 놈이야. 눈좀 떠봐! 쭉 찢어진 가느다란눈에 미소짓기만 하니 눈깔이 안보이잖아!
조금 지나자 소년사제는 여전히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물끄러미 나다를 같이 쳐다보았다. 누가 보면 눈싸움하는 줄 알겠다. 하지만 사제의 눈길은 몹시 부드러웠기에 분위기는 험악해지지 않았다.
초록색이다.
나다는 소년사제의 깊은 초록색 눈동자에 잠시 정신이 나갔다가 퍼뜩 진저리를 치며 시선을 돌렸다. 뭔지 못볼 것을 본것만 같다. 나다는 알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생소한 느낌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사제를 퍽 밀었다.

"이보쇼, 난 헌금할 것도 없고 댁 같은 사제나리는 첨 봐요. 됐어요? 그만 사라져 줄래요?"

저도 모르게 존대를 하긴 했어도 말투는 무척 거칠었기에 화낼만도 했으나 사제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나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눈물을 글썽였다. 나다는 기가 막혔다. 그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나다의 시선을 느낀 사제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물을 부끄러운 듯 감추더니 이번엔 터질듯한 기쁨에 얼굴을 붉힌채 나다의 손을 덥석 잡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 난.. 난 당신을 알아요! 당신도 날 알거에요, 그렇지요?"

"에?"

"무, 물론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지요. 그래서, 굉장히 기뻐요!"

나다는 사제가 두손으로 소중하게 잡은 자신의 손을 팍 빼냈다.

"무슨 소리야?  난 당신을 몰라, 당신도 날 알 리가 없고! 난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오. 착각한거 같은데!"

"어.. 그게... 어..."

사제는 몹시 안타까운 듯 안절부절하며 무어라 말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는 달변으로 보이지 않았고 솔직히 말해서 보통사람보다 말을 못했다. 나다가 다 속이 탈 정도였다.

"뭐라고 말좀 해봐! 어어 거리지 말고!"

이 병신아! 나다가 속으로 욕을 하자 사제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쳐갔다. 나다는 그틈을 놓치지 않고, 사제를 한번 노려본 뒤 다시 길을 걸어갔다. 머리 뒤꼭지에서 사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제 만난 것은 처음이지만... 우린 만난적이 있어요. 아니 적어도 난 당신을 만난적이 있다구요. 잠깐만 기다려요!"

그러나 걸음을 멈출 나다가 아니었다. 나다는 걸음을 더욱 빨리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실제 만난건 처음이지만 만난적이 있다니, 그럼 꿈속에서 만났나?"

"그게.. 예, 비슷해요!"

나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친놈.'

미친 것이 분명하다. 나다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이 사제가 완전히 미쳤다고 판단했다. 아니면 사기꾼이다. '나 몰라? 평민학교 동기잖아!' '먼 친척인데...' 하면서 은근슬쩍 사기치는 놈들이 얼마나 널렸는가.

'사기를 쳐도 좀 그럴듯하게 치지. 꿈속에서 만나? 허 참 나.'



화가나서 씩씩하게 걸어가긴 했지만 나다는 곧 지쳐버렸다. 나다가 쳐다보기만 해도 지나가던 사람들은 다 슬슬 피한다. 도대체 여관이 어딨느냔 말이다! 마을을 몇바퀴째 도는데 여관 아니 술집같이 생긴것도 없었다.

'이 마을엔 여관이 없나보다. 나다야 나다야, 넌 지지리 운도 없구나. 여관이 없으면 이 꼬라지의 널 누가 재워주겠니.'

절망적인 기분에 나다는 짧게 한숨을 뱉았다. 그리고 멀리 뒤에서 자신의 뒤를 졸졸 밟는 '정식사제 나으리'를 한번 노려보았다. 소년사제는 움칠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나다는 자리에 그냥 무너져 앉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경우 저 미쳤거나 사기꾼인 어린놈이 쫓아와서 졸랑졸랑 거릴 것을 생각하니 짜증나서 그러지도 못했다.
그렇게 걸음을 멈추고 잠시 자신을 쳐다보자, 사제는 빙긋 웃더니 종종종 다가왔다. 그 걸음걸이가, 아무리 급해도 조심스럽고 조용해야 하는 사제들이 급할 때 걷는 걸음걸이란 것을 나다는 알고 있었다. 그런 몸가짐은 쉽게 익혀지는 것이 아닌지라 나다는 이 사제가 사기꾼이라기보다는 미친놈쪽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나다의 앞까지 종종거리며 다가온 사제는 빙긋 웃더니 어색하게 머뭇거렸다.

"뭐야?"

원래같으면야 이런 높으신 정식사제에게 함부로 말하는 나다는 몰매를 맞아 마땅했다. 하지만 이 브레일엔 나다에게 몰매를 줄 나라의 병졸이나 교단의 사람들은 없어보였다.

"저.. 여관 찾으시잖아요. 이 마을의 여관은 보통 가정집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저 집.. 이에요."

나다는 사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집을 쳐다보았다. 회백색의 페인트가 칠해진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이층집이고 조금 크긴 하지만 누가 저 집을 여관이라고 보겠는가!
집앞에 늘어진 개가 커다란 입을 벌려 하품하는 것을 보고 나다는 여관을 찾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야, 아깐 왜 모른다고 했어! 내가 이 마을 세네바퀴 돌때까지 넌 재밌었냐!"

사제는 움칠 놀라며 뒤로 한발자욱 물러섰다. 잠시 입을 벌리며 놀라던 사제는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아니에요, 아까는 정말 몰랐습니다. 나다가 여관을 찾는 것 같아 아까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았어요. 진작에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나다가 날 싫어하는 것 같아서 말을 걸 수가 없었던 겁니다. 네, 그런거에요."

나다가 갑자기 눈썹을 치켜뜨고 눈을 험악하게 뜬 채 자신을 노려보자 소년사제는 긴장해서 입을 다물었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그, 그것이..."

낮게 물어보는 나다의 질문에 사제는 잠시 멍해졌다. 나다는 이 멍청한 소년사제가 이젠 무서워졌다. 어쩌면 어리버리해보이는 것은 연극이고, 며칠전부터 나다에 대해 조사했을지도 모른다. 무언가의 음모에 휘말리는 지도 모른다.

"꺼져."

험악하게 낮은 말을 읊조린 나다는 휙 등을 보이며 여관으로 뛰어들어갔다.



브레일은 작은 마을이기에 여관도 작고 초라했다. 찾기도 힘들게 가정집과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이니 분위기를 알만 했다. 그러나 여관은 술집을 겸하고 있었기에 네다섯명의 마을사람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다가 안에 뛰어들어오자 사람들은 모두 코를 막고 구역질을 했다. 식탁을 닦던 여관 주인 마가렛은 걸레를 던지고 허리에 손을 댄 채 삐딱하게 서서 나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다와 시선이 마주치자 조용히 포동포동한 손가락으로 뒷문을 가리켰다.
마가렛이 볼 때 나다의 꼬락서니는 딱 거지였다. 얼마 전 시체를 뒤지고 와서 엄청나게 혐오스러운 악취를 풍기는데다가, 몹시 낡은 커다란 옷을 입고 있었다. 자그마한 몸집에 그렇게 입으니 딱 자루를 뒤집어쓴 것 같다. 나다는 스물 한 살이나 된 청년이었지만 황인인 집시이고, 키가 몹시 작은데다 얼굴도 무척 동안이라 어려보였다. 밤갈색의 긴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묶었고 눈썹은 진하고 갸름하다. 새카만 눈동자와 흰 눈자위는 몹시 총명해보였다.

'전쟁터에서 떠도는 거지 소년같은데, 묵은 빵이나 줘서 보내야지. 냄새 한번 고약하군.'

마가렛은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지소년은 마가렛의 말없는 명령을 무시했다. 선이 분명한 입술을 몇번 실룩이더니 말한다.

"식사부터 줘요. 여기서 먹을 거야."

고집스럽게 깊이 파인 나다의 인중을 보고 마가렛은 어깨를 으쓱했다.

"돈은 있니?"

비웃는 듯한 마가렛의 말에 나다는 발끈 화가 났다. 어쨌든 지금은 피곤해서 신경이 날카롭다. 그는 급하게 푸대자루를 열었다. 그러자 역한 냄새가 한꺼번에 여관에 퍼지고, 순간 식사하던 손님들이 동시에 입안에 있던 음식을 원래의 접시로 다시 되돌려주었다. 푸대 안에서는 더욱더 고약하게 시체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나가! 나가!"

손가락으로 코를 막고 황급히 다가온 마가렛은 나다 앞에서 손을 휘저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나다가 금반지를 하나 꺼내 내밀었으나 마가렛은 험한 얼굴로 나다를 밀쳤다. 거센 아주머니의 손에 밀린 나다의 지친몸은 금새 뒤로 비틀거렸다.
그때 문이 삐걱 열리더니 소년사제가 들어왔다. 마가렛은 사제의 복장을 보더니 금새 얼굴을 풀고 반갑게 맞았다.

"아이고, 사제님 안녕하세요?"

술을 마시던 마을사람들도 엉거주춤 일어나 소년사제에게 예를 표했다. 신성한 치유의 빛으로 사람들을 고쳐주는 정식사제들은 존경의 대상이다. 나다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미친 사제는 좋겠다. 아무리 미쳤어도 사제라서 대접받고 말이야. 으..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어버렸다. 푹신한 침대에 쓰러져 푹 잤으면 소원이 없으련만...'

사람들에게 인사하다 말고 나다를 쳐다본 사제는 빙긋 웃었다. 악의없는 웃음이었으나 악이 받힐대로 받힌 나다에게는 비웃음으로 보였다.

"이 먼길에 어찌 오셨나요? 브레일 근처로 군대가 왔나보군요, 사제님께서 마을에 들르신 것을 보니.."

전쟁터 근처의 사제들은 대개가 군대에 소속된 종군사제들이었다. 마가렛의 사근사근한 질문에 사제는 여전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저는 유랑사제입니다. 마침 이리로 오는 마차편을 얻어탔지요."

"그러시군요. 푹 쉬다 가세요. 방을 하나 잡아드릴까요? 여긴 손님이 거의 없어서 방은 많답니다. 전망좋은 곳에 잡아드리지요."

사근사근한 마가렛과 조용조용한 사제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나다는 피곤해서 쭈그려 앉았다. 사제를 보며 웃던 마가렛이 슬쩍 나다를 보고 험악한 눈길을 보냈지만 나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들어내기 전까진 움직이지 않을 태세다.
사제는 나다를 보고 다시 미소짓더니 마가렛에게 말했다.

"먼저 식사 2인분 주십시오. 그리고 방은 침대가 두 개인 방으로 주십시오."

"아, 일행이 있으신가 보군요. 역시 사제분이신가요? 호호."

마가렛은 정식사제들의 축복을 받을 것을 기다리며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여관으로 몰려올 사람들을 상상하면서 기분좋게 웃었다. 그러다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나다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야, 너 나가! 귀한분들 오신대잖아!"

"아우, 이 아줌씨가. 돈 낼거야! 왜 손님을 쫓아내고 지랄이야!"

"아니 이게?"

그때 사제가 두 사람 사이에 들어왔다.

"저, 저 아주머니. 이 사람이 제 일행입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사제는 마가렛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마가렛은 이런 거지와 사제가 일행이라는것에도 놀랐지만 하찮은 여관주인인 자신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정식사제에게 너무 놀라서 말을 하지 못했다. 나다도 기가 막혀서 입을 벌린채 움찔도 하지 못하는데 사제가 나다를 잡아 일으켰다.

"먼저 씻는 것이 어떨까요? 괜찮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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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갠달프 리오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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